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쇼다 사건 (문단 편집) === [[대영제국|영국]] === 당시 영국에게 가장 중요했던 지역은 [[이집트]]와 [[인도 제국|식민지 인도 제국]]을 잇는 항로였다. 두 국가는 식민지화되기 이전까지 다른 지역에 비해 정치, 경제적으로 비교적 안정된 국가였고 무엇보다 영국이 당시 식민지와 약소 국가들에게 수출하던 [[면화]] 산업의 경쟁 국가였다. 따라서 두 국가를 효율적으로 점령하는 것이 영국에게는 급선무였고 이를 위해 장악해야 하는 것이 [[홍해]] 지역의 항로였다. 이 때문에 영국은 홍해 주변의 [[오스만 제국]]의 영토를 갉아먹기 시작하고 [[수단 공화국|수단]]에도 힘을 써야 했다. 그러나 영국에게 수단은 어디까지나 주된 목적이 아니었던 만큼 점진적으로 지배하며 대충 허수아비 체제로 놔 두려던 상황이었다. || [[파일:external/pds27.egloos.com/e0006522_58eef55156626.jpg|width=100%]] || || 마흐디 운동의 지도자 무함마드 아흐마드 || 그러나 [[1881년]] [[마흐디 운동]]으로 [[독립운동]]이 빈번해지자 영국의 이런 처지는 곤경에 놓였다. [[이슬람]]의 [[마흐디]](구세주)를 자처한 [[누비아인]] 무함마드 아흐마드 빈압드알라(محمد أحمد ابن عبد الله, Muhammad Ahmad bin Abd Allah, 1844–1885)가 이끄는 마흐디군이 급속도로 팽창해서 이슬람 신정국가를 세운 것이다. 거기에 1883년에는 [[냉병기|창과 칼]]로 무장한 마흐디군 4만명이 윌리엄 힉스 영국 육군[[대령]](William Hicks, 1830–1883)의 지휘를 받는 현대식 총과 대포로 무장한 영국-이집트 혼성군 1만명을 샤이칸 전투(Battle of Shaykan, 1883년 11월 3일 ~ 11월 5일)에서 박살냈다. 특히 이 전투에서 패한 힉스 대령도 전사[* 밑에 후술한 영화 [[하르툼]] 공방전 초반부에 마흐디군에게 공격받아 영국-이집트 혼성군이 전멸당하는게 바로 샤이칸 전투다. 영화에서 힉스 대령은 마흐디군이 던진 창을 등에 맞고 전사한다.]하고 [[시체]]는 [[효수]]되면서 영국 여론은 굴욕감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조사 끝에 마흐디를 빨리 잡겠다고 닥돌한 힉스 대령이 패배 원인이 되었다는 게 드러났다. 물을 충분히 보급하지 않아 병력이 목마름에 제대로 싸우지도 못했던 것.]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50px-Charles_George_Gordon_by_Freres.jpg|width=100%]]|| || [[찰스 조지 고든]] || 이런 가운데 1884년 민간인 보호라는 명분으로 식민지 이집트를 지키고자 파견된 영국인 [[총독]] 찰스 조지 고든은 이집트 방위군과 수단의 수도 하르툼(카르툼) 방위전에 나섰으나 구원군이 도착하기 직전에 무하마드 아흐마드군의 반격으로 [[1885년]] [[1월 26일]] 하르툼이 함락당하면서 고든 총독이 '''[[참수]]당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99998&cid=2557&categoryId=2557|하르툼 방위전 1]],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ohwa117&logNo=140096415573|하르툼 방위전 2]] 그런데 고든 총독은 수단이나 북아프리카에선 의외로 평이 나쁘지 않았는데 그는 [[청교도]] 성향이 강하고 성공회인으로 신앙심이 투철했지만 정작 외국인들의 종교에 대해 관대했기 때문이다. 성격도 침착했으며 [[청나라]]에서도 현지인들에게 종교 강요는 하지 않았던 인물이었고 수단에서도 똑같았다. 게다가 현지에 남아 있던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노예들의 교육이나 자립에까지 관심을 보였으며[* 이런 점 때문에 지금도 남수단에서 고든에 대한 인식이 좋은데 노예의 다수가 바로 [[흑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마흐디 신국은 흑인 노예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흑인들은 마흐디 신국을 싫어했다. 다만 마흐디 신국도 무조건 흑인을 차별한 게 아니라 흑인 성직자나 흑인들도 일원으로 우대했기 때문에 흑인 신분차별 정도로 봤지 인종차별을 한 것은 아니다. 아무튼 이것이 흑인들이 영국을 따르게 만들어 이후 남수단 갈등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또 고든 총독은 현대적인 도덕관점과 인권주의적인 행보를 자주 보였는데 [[제2차 아편전쟁]]에 참전했을 때 동료들의 원명원 약탈과 방화를 야만스럽다고 비판했으며 [[태평천국의 난]] 당시 [[청나라]]에 상승군 용병대장으로 고용되었을 때 자신의 협상으로 [[쑤저우|소주]] 무혈항복을 받아냈으나 [[이홍장]]의 뒤통수로 항복한 태평군이 [[학살]]당하자 이홍장을 죽여 버리겠다고 크게 분노했고 종전 후 황제가 참전 장군들에게 선물을 보내자 이때 소주 학살을 들면서 선물을 거부했다. 물론 이홍장도 태평군이 벌인 학살을 이야기하긴 했지만.] 현지인이 믿는 [[이슬람]]에 꽤 관대하게 대했고 현지인 부하들도 잘 대해 줬기 때문에 대부분이 [[무슬림]]인 7천여명 이집트 및 수단인 부하들은 마지막까지 그와 같이 하다가 모두 죽었다. 마흐디도 그에 대한 평을 듣고 '유럽 [[기독교]]놈치곤 그나마 나은 놈'이라며 죽이지 말라고 했지만 부하들이 죽여서 목을 베어 가지고 오자 불같이 화냈다는 기록도 있다.[* 이런 점도 있지만 마흐디가 국제적 외교에 대한 안목이 있었다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영국인]] 총독을 죽이지 않고 잘 우대하면 영국에서는 일단 명분 없이 쳐들어갈 수 없으니까 마흐디 신국에 대하여 닥돌공격을 자제한다든지 이런 걸 노렸다는 것이다. 고든이 죽고 효수되자 영국 신문들이 1면으로 보도하면서 영국의 굴욕 드립을 쳤으니 여론이 분노했다.] 당시 상황을 보면 마흐디는 사전에 협상을 시도하면서 고든에게 타협의 여지를 주었는데 아예 [[무슬림]]으로 개종하라고 몇 번이나 고든을 설득하게끔 대리인을 보낼 정도였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무엄하게 요구해서 기분이 상했나?" 하여 다음에는 부드럽게 설득하고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마흐디 신민들은 그대를 아주 찢어죽일 정도로 미워하니 나로서도 지켜드릴 수 없소, 칼 같이 무슬림이 되라는 게 아니오. 아니, 하다못해 적당히 무슬림으로 [[개종]]했다고 하고 나중에 영국으로 돌려보내드리겠소. 거기서 다시 기독교인이 되던지 그건 자유요." 같은 내용의 편지까지 보냈다! 이게 참 놀라운 게 마흐디는 수단에서 잡힌 기독교인에게 '너 개종할래, 안 할래?' 한 마디 하고 안하면 '즉각 [[참수]]!' 이렇게 하던 인물이었다는 점이다. 이렇게까지 [[편지]]로 여럿 보내면서 설득했다는 건 그만큼 고든이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다. 이에 고든은 "마흐디 당신의 성의는 [[감사]]하지만 잠깐이라도 내 [[신앙]]을 버릴 수 없소. 반대로 마흐디 [[역지사지|당신이 거꾸로 되어]] 내가 잠깐이라도 기독교인으로 [[개종]]하는 척 하라고 하면 하실 수 있으시오?" 라며 거절한다고 답변했다. || [[파일:external/pds27.egloos.com/e0006522_58eef555ab245.jpg|width=100%]] || [[파일:external/thumbnail.egloos.net/e0006522_58eef542b9a17.jpg|width=100%]] || || 고든의 최후를 상상하여 그린 그림.[* 총독이었던 그는 현지인들처럼 [[페스(모자)|페스]]를 쓰고 다녔으며 죽을 때도 현지인 부하들처럼 입고 페스를 쓴 채 싸우다가 죽었다고 한다. 이래서인지 그의 사후 세워진 동상도 페스를 쓴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단순히 문화 존중 차원에서 페스를 쓴 것은 아니고 고든이 이집트 정부에서 파견된 수단 총독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국]]화되기는 했으나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제후국이었으며 따라서 고든도 이집트에 파견되면서 형식상으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관직을 받았다. 영화 <하르툼>에 등장하는 영국-이집트군이 정작 [[터키]] 깃발을 휘날리면서 진군하는 이유도 여기 있다.] || 영국에 세워진 고든의 동상 || 게다가 고든은 이미 1884년 말에 조국 영국에게 그대 잘못은 없으니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내가 할 일을 마지막까지 하겠다고 끝까지 남았던 터라 영국에서 책임감도 있던 위인이라고 칭송한다. 수단에 그의 [[동상(조형물)|동상]]이 세워졌다가 수단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 고향으로 옮겨져 지금은 영국에 있다. 고든의 머리는 말 그대로 [[효수]]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 당시 죽은 고든의 시체는 끝내 찾지 못하고 영국에 가묘로 안장되었다. 고든의 죽음은 "순교"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독실한 [[성공회]] 신도였으나 적어도 선교에 나서지 않았고 그가 죽을 때 [[무슬림]] 부하들도 모두 그와 생사를 함께했을 정도로 타종교에 관대해 극단주의 무장운동을 벌이던 마흐디 본인조차도 인정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마흐디가 얼마 안 가 죽고 마흐디를 이어 마흐디 신국을 지배한 마디야는 고든을 증오하여 그의 머리를 거리에 매달고 돌을 던지거나 침을 뱉게 했다. 마디야는 결국 마흐디 신국의 마지막과 같이 [[영국군]]에게 죽었다.][* 참고로 <하르툼 공방전>의 마지막 나레이션처럼 마흐디도 고든이 죽고 나서 몇 달 안 가 [[발진 티푸스]]로 죽었고 그의 죽음으로 마흐디 신국은 와해되기 시작했다.] 고든이 그런 선교 행위를 했더라면 마흐디가 과연 저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거다. 게다가 마흐디 신국을 뭉개고 수단 총독이 된 윈게이트 [[백작]]조차도 이슬람을 싫어했지만 고든을 이렇게 떠받드는 거나 기독교인의 수단 선교를 무척 불쾌하게 여겼고 결국 [[1902년]]에는 북수단(현재 수단)에 대한 기독교 선교를 아예 금지하였다. 영국이나 유럽 기독교 측에서 반발하자 윈게이트 백작은 "기독교인이 하는 선교짓거리가 무슬림 극단파랑 차이가 뭐냐?"고 비난했을 정도였다. 참고로 [[미국]]에서 [[복음주의 선교]]로 유명한 목사 빌리 그레이엄이 위대한 순교자라고 고든을 찬양하며 기리자 정작 고든의 증손자가 증조부를 따라죽은 무슬림들은 개종도 하지 않았듯이 적어도 종교에 미치지 않은 분을 종교에 미친 놈으로 멋대로 포장한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당시 국내 정치적으로도 위기에 빠졌던 [[영국 자유당]]의 [[글래드스턴]] [[총리]]는 고든이 참수당한 후 [[효수|목이 내걸렸다]]는 정보를 듣곤 "하필이면 이 때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라고 화내면서 큰소리를 냈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조차도 전보를 보내 사임을 권했을 정도로 인기가 떨어진 글래드스턴은 결국 곤경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반 년만에 사임했다. 뒤를 이은 것은 보수당의 [[로버트 게스코인세실|솔즈베리 경]] 소수당 내각이었다.[* 글래드스턴 총리는 6년 뒤에 다시 총리로 재임하여 2년 가까이 일하다가 85세에 고령으로 은퇴했다.] 수단의 마흐디 신국은 이후에도 일시적으로 방치되었으나 대영제국의 떨어진 위신을 상징하는 생선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영국군]]은 결국 굴욕으로부터 13년 만에 고든의 복수를 위하여 대규모로 수단 침공에 나섰다.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 정책의 수행을 위해 [[허버트 키치너]](Herbert Kitchener) [[장군]]은 수단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면서 [[철도]]를 부설하였고 [[1898년]] 9월 옴두르만 전투에서 [[맥심 기관총]]을 앞세워 고작 47명의 전사자만을 내고 마흐디군 5만 2천 중 1만 명 이상을 그 자리에서 말 그대로 지워 버렸다. 이후 하르툼을 다시 함락시키고 마흐디 신국을 멸망시키면서[* 마흐디는 이미 병으로 죽어서 묻혀 있었는데 바로 고든의 아들이 이끌던 영국 육군은 마흐디의 무덤을 박살내고 시체를 불태우면서 분풀이를 했다. 하지만 영국 [[타임스]] 지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비난하며 "관대함으로 베풀었다면 몰라도 똑같이 따라하니 갈등은 계속 될 것이다."라는 기사를 썼다. 결국 그 기사처럼 현지인들은 영국 식민지배 아래에서 이를 갈았고 심지어 마흐디의 후손들은 70년 가까이 지난 1966년 영화 하르툼을 제작할 때 찾아온 미국인들에게 증언하면서도 이를 갈았다고 한다. 결국 77년이 지난 1975년에야 고든의 후손과 마흐디의 후손이 만나 서로 화해하고 고든의 후손이 사과했다고 한다.] 빠르게 남하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